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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고추밭연가

고추밭연가
  • 저자장미숙
  • 출판사지식과감성#
  • 출판년2017-06-01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7-11-09)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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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그라미를 그리다



    하얀 도화지 위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아니, 그리다가 만다. 잠깐 생각에 잠긴다. 동그라미를 어디까지 그려야 할지 몰라서다. 동그라미의 첫 시작은 탄생(誕生)이니 동그라미의 끝은 사멸(死滅)일 수밖에 없다. 아직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나는 동그라미의 어느 부분에 서 있는 것일까. 심오한 생각에 잠긴다.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나이니 원의 지름에 위치하진 않을 것이다. 15도나 30도, 아니 어쩌면 45도까지 사멸 쪽으로 기울어진 건 아닐까. 그렇더라도 상관없다. 기울기는 어느 지점에서 진행할 수도, 퇴보할 수도 있어서다. 삶의 동그라미는 탄생과 사멸이 만나야 완벽해진다. 하지만 동그라미의 끝과 끝이 만나는 지점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서 다행이다. 그 공간을 희망으로 채울 수 있어서다.

    동그라미를 그리다 말고 왔던 길로 거슬러가 본다. 사십 대, 삼십 대, 이십 대, 십 대, 유년기까지 나름대로 위치를 정해 본다. 그리고 가만히 바라본다. 그것들은 제각기 다른 색깔을 갖고 있다. 색깔뿐 아니라 길이도 다르다. 살아 있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죽어 있는 시간도 있다. 생생한 기억으로 재생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흐릿한 형체로 기억되는 부분도 있다.

    지나온 발자취는 과거의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봉인된다. 그건 한사람이 살아온 거대한 역사의 저장 공간이다. 역사는 위대한 나라, 위대한 영웅들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한 사람의 삶도 역사가 될 수 있다. 항아리의 뚜껑을 열고 그들을 깨워 의미를 부여했을 때 그것들은 살아나서 개인의 역사를 완성한다. 수필은 그 역사를 실현해 주는 행동철학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의 내용이 있다. 의미도 마찬가지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느 한순간과 사건들, 에피소드는 행복이 될 수도, 고통이 될 수도 있다. 감정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그건 한순간의 일이다. 시간이 개입하면 그것은 공기 속에 소멸(消滅)된다. 그리고 그 시간을 장식했던 모든 건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다시 꺼내주지 않으면 그저 과거의 일일 뿐이다. 그렇게 쌓인 수많은 일들,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대단한 것일지라도 지나고 나면 그뿐이다.

    글쓰기는 그것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꽃을 피우게 하는 일이다. 특히 수필은 자신의 삶과 인생을 담는 그릇이라 했다. 자신의 현재를 뒷받침해 주었던 커다란 깨우침이나 울음이 자라던 날, 웃음이 팡팡 터지던 날에 밑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하는 일이다.

    나의 수필 쓰기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내는 일이었다. 병이 되기 전, 암 덩어리처럼 굳어지기 전에 응어리를 한 가닥 한 가닥 풀어헤쳐 맑은 햇살과 바람에 말리는 일이었다. 그 응어리 속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가족이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아픔의 근원(根源)이었다. 툭 건드리면 울음이 쏟아질 것 같은 어머니의 삶은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를 빼놓고 내 삶을 말하기는 힘들었다. 내 글 속에 어머니가 수없이 등장하는 이유다.

    내게 어머니는 무조건 옳다. 앞뒤가 맞지 않고, 이치에 어긋나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얼토당토않은 일에 화를 내도 어머니는 내게 항상 옳다. 여태껏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머니의 희생을 진부한 언어, 신파적 표현으로 미화하고 싶진 않다. 진솔함으로 다가갈 수 있으면 어머니의 한(恨)을 조금이라도 씻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내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지난 일에만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현재 발을 딛고 있는 생활 속 이야기들을 나는 수필 속에 담는다. 대개는 힘없고, 가난한 이웃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많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들의 모습과 그들의 삶이 눈에 더 잘 띈다. 어쩌면 내 삶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 쉽지 않다. 자신의 못난 부분과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진실을 말할 수는 없다. 내게 수필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더 매력을 느끼고 그 매력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되었다.

    수필에 푹 빠져 살면서부터 내게는 시간개념이 달라졌다. 시간을 어떻게 쪼개 효과적으로 이용할 것인가를 매일 생각한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이 내게는 황금시간이다. 그 시간은 온통 글쓰기에 전념한다. 생각을 모으기 위해 눈을 감고 수많은 곳을 둘러본다. 과거, 미래는 물론이고, 어디선가 본 풍경,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 등, 하나도 허투루 버릴 수가 없다. 모두가 소중한 삶들이고, 모두가 소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평일 저녁에는 거의 매일 운동을 하러 다닌다. 가끔은 피곤한 몸이 운동을 못 하게 방해하기도 한다.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운동을 빠지라고 부추길 때가 있다. 그 순간의 갈등을 이기고 운동을 가는 날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건강한 글쓰기에는 건강한 몸과 마음이 필요조건이라는 생각에서다. 한곳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글을 쓰고 있는데도 글에 대해 목이 마르다. 아직도 한없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목마름은 앞으로 더 간절해질지도 모른다. 민얼굴을 세상에 내놓았으니 그에 대한 책임감을 벗어버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아직 채우지 못한 동그라미를 완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록 사멸에 훨씬 더 가까워진 동그라미지만 거기에는 희망이 있으니 두렵지 않다.

    심오한 철학(哲學)과 폭넓은 지식, 넘치는 해학(諧謔)과 깊은 설득력이 있는 글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가슴에 잠깐 머물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으리라. 내 삶의 스승이며 글의 주체(主體)가 되어준 어머니께 이 책을 바친다.











    수필, 어머니의 전기(傳記)



    이상렬/문학평론가



    언어는 사물을 완벽하게 드러낼 수 없다는 숙명적 한계를 지닌다. 성서에 바벨탑 사건이 소개된다. 인간은 하늘 높이 탑을 쌓는다. 이것은 노동과 건축의 차원이 아닌, 신의 영역에 대한 침범을 의미한다. 신은 인간의 언어를 흩어버린다. 이 사건은 인간 언어의 유한성이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따라서 실제와 언어는 다를 수밖에 없다. 애초에 어휘로 대상을 다 표현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

    희망은 있다. 문학 장르 중, 글과 실재(實在)가 거리감을 느낄 수 없는 형식의 글이 수필이다. 나에 대해서, 내가 산 생애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글 속의 ‘나’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나’와 같은 사람이다. 실재와 어휘의 거리가 가장 근접한 글쓰기, 작가 장미숙의 수필이다. 생애에 대한 진술이라 더 그런 것일까. 자신이 걸어왔던 삶의 경험을 완전무결하게 표현해 주지 못하는 언어와 사투를 벌이면서 고독하게, 진실하게 생을 진술했다.



    1. 어머니전기(傳記), 수필은 나의 어머니



    수필은 작가 그대로를 반영(反映)한다. 작품 3~4편 정도를 읽으면 작가의 사상과 세계관이, 즉 심연(深淵)이 보인다. 작가가 작품 속에서 자신을 구현하든 아니든 글은 자신이 남긴 또 하나의 ‘나’라는 결과물을 의미한다. 작가는 수필이라는 ‘삶과 인생을 담는 그릇 속’으로 자신의 세계를 가두어 놓은 것 같지만, 독자는 읽는 순간 글을 통해 작가의 세계를 보게 된다. 따라서 작가의 수필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항아리 속에 봉인된 이야기’를 해제하고 ‘한 사람이 살아온 거대한 역사의 저장 공간’을 여는 행위다. 항아리와 저장 공간 안에는 많은 사연이 내포되어 있다. 연가가 흐르는 고추밭 이야기, 우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빨래하던 여인, 발그스름한 노을을 배경으로 허리를 수그리고 삽질을 하던 여인, 하루 아홉 시간 이상 일하는 어느 빵 가게 이야기, 절구통이 있어 따뜻한 고향 집 이야기, 미역 줄기처럼 보낸 청춘의 한때 고단한 이야기가 한 사람이 걸어온 역사의 곳간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중 정작 보관하고 싶었던 존재는 무엇이었나.



    작가의 변(言)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나의 수필 쓰기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내는 일이었다. 병이 되기 전, 암 덩어리처럼 굳어지기 전에 응어리를 한 가닥 한 가닥 풀어헤쳐 맑은 햇살과 바람에 말리는 일이었다. 그 응어리 속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가족이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아픔의 근원(根源)이었다. 툭 건드리면 울음이 쏟아질 것 같은 어머니의 인생은 내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를 빼놓고 내 삶을 말하기는 힘들었다. 내 글 속에 어머니가 수없이 등장하는 이유다. … 내 삶의 스승이며 글의 주체(主體)가 되어준 어머니께 이 책을 바친다.



    작가의 인생 배후(背後)에 뭔가 믿을 구석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무엇이 작가를 세파와 망각의 세월로부터 지켜준 것일까. 어머니다. 장미숙은 자신의 긴 여정 속에 ‘어머니를 빼놓고는 내 삶을 말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것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언어를 통해 궁극으로 꿈꾸는 건 어머니였다. ‘지구의 중심을 꽉 잡고 땅속 깊숙이 제 몸을 비틀며 생명을 이어가는 도라지’처럼 작품의 중심에, 모든 행간(行間)에 어머니와 어머니의 것과 어머니의 정신이 스며 있다. 하나하나가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를 지향한다. 장미숙 수필의 주인공은 어머니였다.

    장미숙의 수필은 사모곡(思母曲)이다. 어찌할 수 없는 아버지의 병치레에 어머니는 속울음 속으로 자신을 숨겼다. 바람 잘 날 없는 전장 같은 가정사에 눌린 작가는 풀밭에 한 뼘 웃자란 잡초처럼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탁월한 사유의 힘도, 기민한 어휘의 능력도, 작가라는 자의식도, 인간본질에 대한 존엄성도, 낮은 자를 바라보는 긍휼의 시선도 이런 연유에서 기인했으리라. 어머니에 대한 작가의 기억은 ‘가슴에 도라지꽃이 망울망울’ 피도록 아팠다. 삶이 시퍼렇게 피멍이 들 때면 어머니는 깜깜한 밤에도, 여명이 트기 전에도 잠에서 깨어 작고 앙상한 초가집의 고요를 깨웠다.



    고통의 순간들이 때로는 삶을 지탱해 주는 약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어머니는 몸소 보여 주었다. 아버지마저 병으로 어머니의 짐이 되어 버렸을 때 어머니는 악착같이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신 듯 똬리 위에 온갖 것들을 올렸다. 어머니가 머리에서 똬리를 내려놓은 게 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머니는 영원히 당신의 생에서 똬리를 내려놓지 못하셨다. 언젠가 어머니 머리에 파마를 해드리다가 맞닥뜨린 동그란 상처는 세월이 어머니께 바친 핏빛 훈장이었다. 그날 이후 어머니의 훈장은 또한 내 삶의 좌우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자칫 모든 것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었을 물리적인 힘과의 균형을 똬리가 잡아줬듯이, 위태롭게 흔들리던 집안을 바로잡은 건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이었다.

    -「똬리」 부문





    장미숙의 수필은 곧 삶과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출발했다. 그 출발점에 어머니가 서 계신다. 악착같이 살아야겠다는 삶에 대한 애착과 인간을 소중히 여기고 인간의 본질을 풀어내는 삶의 문학을 어머니로부터 체득했다. 내게 주어진 생애에 대한 본능적 애착 없이, 사람에 대한 애정 없이 어찌 수필을 쓸 수 있겠는가. 작가에게 있어서 사람과 사물을 사랑하는 진원지는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 작가의 글을 읽노라면 행간이 축축하다. 그러나 막상 후련하게 울음을 터뜨려야 할 때는 울지 않는다. 그 대신 작가는 썼다. 그냥 담담하게 서사를 펼쳤다. 울음이 북받쳐올 때면 서사(敍事)에다 가만히 서정(抒情)을 올려놓기도 했다. 그렇다. 숱한 상실과 모순, 굴곡의 세월을 경험하면서도 맞이하는 모든 대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촉발하는, 그 초인적인 힘의 원천(源泉)이 어머니였다. 따라서 어머니는 그녀의 문학적 모국어였다.

    장미숙의 또 하나의 문학적 뿌리는 어머니와 더불어 고향이다. 무엇보다 고향은 수필을 쓰는 장미숙에게 문학적 수원지이며 모국어의 속살이다. 거친 듯 자연스럽고, 찰지고 질박한 남도 사투리, 그 정서를 있는 그대로 담았다. 장미숙 수필 언어의 토양은 가난이 족쇄였던 가정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오랜 병마, 어머니의 울음 삼킨 긴 한숨, 도저히 풀리지 않을 질곡의 가난마저도 수필의 배후가 되었다. 둘러싼 모든 자연과 원초적 사귐을 나눌 수 있었던 환경, 상처로 점철된 가정사의 아픔이 아니었다면 수필에 대해 이처럼 아름다운 집착은 없었으리라. 앙가슴 깊이 숨어 있는 한이 모질면 모질수록 작가의 글쓰기는 불덩어리가 되었다.



    2. 또 하나의 동기, 고통



    작가 장미숙의 작품 몇 편만 읽게 되면 금세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진솔한 고통의 흔적이다. 그의 고통을 ‘진솔함’으로 표현하고픈 것은 절망도, 도피도, 체념도, 아닌 고통과 당당히 맞섰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미역 줄기」를 보면 얼마나 당당히 직면했는지를 알 수 있다.



    미역 줄기는 내 청춘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먹을거리 중 하나다. 가장 아름답고 꿈이 많다고 하는 이십 대 전후, 하지만 나의 젊은 날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활짝 피어나지 못한 꿈이 한없이 움츠러들어 끝내는 펴보지도 못한 채 저버린 시절이었다. 그래서인가 그 시절은 미역 줄기처럼 소금기 간간한 맛으로 재생된다. 중학교를 마치고 부모님 품을 떠나 자리를 잡은 곳은 부산이었다. 두 언니가 먼저 부산에서 터를 잡고 있던 터라 무조건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나는 언니들과 떨어져 혼자 사는 일에 익숙해졌다.

    -「미역줄기」부문



    설움과 배고픔의 한가운데 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글을 쓸 수 없다. 자신의 삶을 할퀴고 지나간 가난한 청소년기였다고 하지만, 그 혹독함 앞에 작가는 오히려 기품 있어 보인다.

    ‘삶은 고해(苦海)다.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진리다.’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첫 문장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생의 나상(裸像)을 ‘가시와 엉겅퀴’라 했다. 성서의 표현이다. 신과 에덴으로부터 알몸으로 쫓겨난 인간의 본질적 이미지가 가시처럼 아프고, 엉겅퀴같이 거칠다는 것, 인생을 대변한 절묘한 그림이 아닌가. 이것은 연구 분석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실존(實存) 앞에서 진지하게 살아 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근데, 살면 살수록 힘이 든다. 이것은 그만큼 성장했다는 증거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자신이 접촉하는 세계의 면적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더 많은 모임,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대상과 직면한다. 가령, 10대가 접촉하는 세계의 면적과 40대가 접촉하는 세계의 면적은 다르다. 접촉면이 넓혀질 때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은 고통이다. 고통으로 빚어낸 삶의 성숙은 곧 한 사람의 문학적 깊이를 말해준다. 장미숙 작가가 그렇다. 그렇게 삶의 고난과 함께 자신을 확대해 나갔다. 결코, 고통을 불행이라고 가난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녀의 어둠은 밝음의 반대개념이 아니다. 밝음을 더욱 선명하게 하는 선연한 배후였다. 제 몸 스스로 울음을 터트린다면 상처가 외치는 소리일 게 분명하지만, 작가는 상처가 내지르는 아우성을 글쓰기로 잠재웠다. 그 성숙의 극점에 이르기 위해서 부단히 분투하는 자가 작가 장미숙이다.



    그런데도 나는 다시 달리고 싶다. 잠자리에 누워 영원한 잠에 빠져들고 싶던 마음도 아침이 되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그늘진 시간 속에 웅크리고 싶던 못난 마음도 단련된 일상 앞에 무릎을 꿇는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기에는 가야 할 길이 너무 짧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강한 채찍질 앞에 나는 다시 주먹을 불끈 쥔다. 삶의 바퀴는 닳을 대로 닳아 너덜거리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한 희망이 있기에 몸을 일으켜 세운다. 다행인 것은 수많은 길을 굴러온 탓에 넘어지면 일어서는 힘을 길렀고, 상처를 싸매는 법도 알아냈다는 것이다. 오르막길에서는 호흡을 가다듬는 것도 배웠고, 두려우면 뒷걸음질 치기보다 정면으로 직시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마, 구를 힘이 남아 있는 한 내 삶의 바퀴는 멈추지 않으리라. 내가 굴러가야 할 길이 저만치서 손짓한다. 지친 시간을 다독거리며 인생 바퀴의 페달에 나는 한 발을 힘차게 올려놓는다. 다시 시작이다.

    -「바퀴」부문



    모든 세계는 작가에 의해서 해석(解釋)된다. 대상의 가치는 해석의 탁월함으로 빛이 난다. 작가의 해석력은 탁월하다. 대상을 관찰하여 작가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해석하는 탁월함, 하지만 그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곧 삶이다. 삶에 대한 해석이다. 무엇보다 고통에 대한 창조적 해석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해석이다. 어머니의 외줄과 같았던 사람, 온 가족이 당하는 고통의 중심부에 계셨던 아버지, 어쩌다가 이명처럼 귓가에 스치는 아버지의 술 냄새와 낯선 너털웃음까지도 응어리로 짜내어 글쓰기의 아픈 동기로 삼았다. 숨이 찬 청년의 세월을 객고에서 부대끼며 보내면서도 결코 무너질 수 없다는 야무진 동기의 근원이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너지는 사람이 있고, 또 그런 아버지 때문에 오히려 너끈히 일어서는 사람이 있다. 작가는 무너지지 않았다. 곧 해석의 승리다.

    사람이 당하는 시련의 과정과 창조성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형성된다. 한 사람의 인간이 견고하게 버틸 힘이 있다면, 그것은 고난 자체 때문이 아니라, 시련 앞에서 건강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삶의 질고를 짊어지고서 설령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면적으로 이미 극복한 것이다.

    폴 트리니에는 자신의 책 「고통보다 깊은」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덕적 견지에서 선과 악은 사물(대상, 사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인격 속에 존재한다. 사물과 사건은 행운에 속하든 불행에 속하든 그냥 존재하는 것일 뿐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다. 고통은 중립적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에 반응하는 방식이다. 고통 앞에 태도가 성장과 퇴보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에 대해 본능적으로 저항하려는 의지가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으로 저항하는가. 창조력이다. 작가의 창조성은 고통을 이기는 도구인 동시에 고통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가집 「시경(詩經)」이 북방 문학이라면, 시경과 함께 중국 고전문학의 큰 기둥이라고 할 만한 「초사(楚辭)」는 중국의 남방 문학이다. 중국의 역사는 북방정권에 의한 남방정권의 지배로 해석된다. 북방과 남방이 싸우면 북방이 줄곧 이겼다. 남방은 패배의 땅이었다. 그러나 문학은 정반대다. 오히려 남방 문학이 더 창조적이며 예술적 정서가 풍부하게 담겼다. 외부의 힘에 위협을 느끼는 순간, 저항하는 것이 인간 본성이다. 이게 변방의 저항성이다. 오히려 억압 속에서 본성 밑바닥에 차 있던 자유분방함과 엄청난 문학적 에너지가 용솟음치는 것이다.

    장미숙의 문학이 그렇다. 그녀는 변방(邊方)의 저항력을 지니고 있다. 볕 따사롭게 비치는 안락한 소파에서는 보편적 정서를 뛰어넘기 힘들다. 역사적으로 이런 경우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예술의 황금기 르네상스(Renaissance)가 그렇다. 이 시기의 위대한 예술품들은 평화로운 작업 환경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르네상스는 흑사병, 종교전쟁, 마녀사냥, 묵시적(默示的)종말론 등 역사상 가장 불길한 시대 중 하나였다. 예술가들은 상황적 한계를 뛰어넘는 창조성이 발산한다. 극단적 곤경에서 뜻밖에 창조성이 발휘됨을 말한다.

    작가 장미숙의 작품 하나하나가 그러하다. ‘필요는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다. 그녀의 뜨거운 창작 혼과 창조력은 절박함에서 비롯되었고, 절박함은 상실과 결핍이 만들어낸 문학의 동기였다.



    3. 어머니와 고난의 연관성



    어머니는 고통의 습격에 호락호락 무너지지 않는다. 웬만한 역경에도 잠시 흔들릴 뿐 끄떡없다. 그 뚝기는 설움과 외로움, 고난의 세월을 이겨낸 세월이 가르쳐준 비법인지도 모른다. 배워서가 아닌, 오로지 체험으로 얻은 경험의 산물이다. 자식과 해학(諧謔, Humour)이라는 무기로 두려움 앞에 당당히 맞선다. 상실과 아픔을 자식 사랑으로 버무릴 줄 알고, 끝이 없어 보이는 고난을 해학에 실어 보낼 줄도 안다. 자식만 생각하면 고생도 흥(興)이 되는가. 작가의 어머니는 진정한 삶의 고수다.



    그렇다. 가슴속에서 수없이 외쳤을 어머니, 이 한 단어로 그는 정신없이 흐르는 시간의 유속을 버티어 냈고 인간 세상 닳아빠진 논리에 맞짱을 떴다. 그렇게 작가는 어머니로부터 고통을 이기는 법을 배웠다.



    어디 겉으로 드러난 얼굴뿐이겠는가. 고된 노동으로 몸은 사득다리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구멍 뚫린 뼈에 바람이 들어 겨울밤이면 시리고 아프다고 하신다. 어머니의 육체는 속이 텅 비어버린 고목이나 다를 바 없다. 어머니가 그렇게 된 건 자식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 때문이다. 어머니가 내어준 피와 살은 우리를 살찌우고 험한 세상에서 견디어 낼 힘이 되어 주었다.

    -「순(荀)」의 부문



    고추밭 고랑을 타고 허리가 기역으로 굽을 때까지 일을 놓지 못한 어머니처럼 작가 역시 현재의 자리에서 견뎌 내는 법을 배웠다. 작은 어깨에 5남매의 삶을 짊어지고 묵묵히 몸으로 가르쳤던 어머니처럼 작가 역시 침묵으로 말하는 법을 터득했다. ‘결코 포기할 수도, 마음속에서 꺼내놓을 수도 없는’ 질병으로 무너졌던 아버지에게 끝까지 신의를 지켰던 어머니처럼 작가도 누군가를 믿어 주리라. 새참을 이고 농촌 들녘을 누비는 순간에도, 보릿자루를 머리에 이고 노을이 지는 오솔길을 걸어 귀가하는 순간에도, 마른 나뭇가지 다발을 어깨에 지고 산길을 내려오는 순간에도 삶의 수필을 썼던 어머니처럼 작가는 오늘도 수필을 쓴다.

    어머니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한 적은 없어도 진정한 성인이다. 자식 하나라면 목숨이라도 바치는 성인,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이 없어도 어머니는 철학자다. 풀 한 포기, 햇살 한 자락에도 은밀하게 말을 걸어보고, 자연이 품은 냄새와 꿈틀대는 미물과도 소통이 가능한 삶의 철학자, 그래서 작가의 수필에서 가장 위대한 주연은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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